2016년 4월 13일 수요일

[21세기 자본론] 제 2 부 - 제 3 장 자본의 변신 (pp.138-169, 김성희)

<  제    2    부    -    자 본 / 소 득   비 율 의   동 학   >

제 3 장 자본의 변신 (pp.138-169, 김성희)

부의 속성 : 문학에서 현실까지

  • 발자크와 제인 오스틴이 소설을 쓰던 19세기 초 부의 속성은 자산 소유주의 확실하고 정기적인 소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졌다. 고리오 영감은 국채를 소유했고, 『이성과 감성』에서 존 대시우드가 상속받은 것은 농경지였다. 139p.
  • 토지와 국채라는 두 자본 자산은 서로 다른 논점을 제기하게 된다. 국채는 한 국가의 국민 가운데 일부, 이자를 받는 사람들이 또 다른 집단인 세금을 내는 이들에 대해 갖는 청구권이다. 개인에 재산에만 포함되며 국가의 부에서는 제외되어야 한다. 139p.
  • 평온한 자본과 위험한 투자 가운데 자본의 실제 모습은 어디에 가까울까? 자본의 심층적인 구조가 실질적으로 변화했다고 할 수 있을까? 자본은 처음에는 형성되기 위해 위험요소가 있고 기업가정신을 필요로 하지만, 충분히 축적되면 늘 지대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자본의 사명이자 논리적 귀결이다. 그러나 우리는 발자크나 오스틴 시대과 지금의 사회적 불평등이 아주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현대의 자본이 더 ‘역동적’이고 ‘지대 추구’의 속성은 약해졌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은 객관적으로 풀이될 수 있을까?

영국과 프랑스에서의 자본의 변신

  • 18세기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구조의 변화는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잘 드러낼 수 있다. 143p의 도표를 보면 두 가지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먼저 두 국가의 자본/소득 비율이 비슷한 궤적을 따랐다는 점이다. 18~19세기 비교적 안정적으로 머물다가 20세기에 충격을 경험한 후 1차 세계 대전직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1914에 이르기까지 영국과 프랑스의 국민 총자본의 가치는 국민소득의 6~7배를 오르내렸다. 1차 대전으로 자본/소득 비율은 추락했고, 50년대에는 국민 소득의 2~3배로 떨어졌다. 이후에는 자본/소득 비율이 상승해 계속 높아지고 있다. 2010년에는 국민 소득의 대략 5~6배의 자본의 총 가치를 볼 수 있다. 143p.
  • 자본 / 소득 비율은 1914~1945 년 거의 2/3이나 떨어졌다가 1945~2012년 다시 2배 상승했다. 20세기 엄청난 변동을 겪었으나 결론적으로는 자본/소득 비율이 제 1사 세계대전 이전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자본 총량을 국민소득이 아닌 가계가처분소득으로 나눌 경우 심지어 제 1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을 넘어선다. 부는 다시 한 번 번창 하고 있는 것이다. 144p
  • 그래프를 통한 두 번째 결론 : 자본/소득 비율의 전체적인 변환은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변화가 1700년 이후 자본 구성요소들에 나타난 엄청난 변화들을 가리게 해서는 안된다. 오랜 기간에 걸쳐 농경지는 점차 건물, 기업과 정부 기관이 투자한 사업자본 및 금융자본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연간소득 대비 자본 총량의 규모는 실질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145p.
  • 도표들에 나타난 자본은 민간자본과 공공자본의 합으로 정의된다. 그래서 각국의 국민이 자국 정부 발행 채권만 갖고 있다면, 민간부문 의 자산인 동시에 공공부문의 부채인 정부 부채는 합쳤을 때 순 가치가 제로가 된다. 국민 총자본은 정의상 국내자본과 순 해외 자본으로 나뉠 수 있다. 국내 자본은 한 국가의 영토 내에 있는 자본 총량(건물, 회사)등의 가치로 측정한다. 순 해외 자본(혹은 순 해외 자산)은 한 나라의 부를 다른 국가들과 관련지어 측정한다. 다시 말해 어떤 국가의 거주자가 소유한 다른 국가의 자산에서 다른 국가 사람들이 소유한 이 국가의 자산(국채 형태의 자산 포함)을 뺀 값이다. 145p.
  • 국내자본은 다시 농경지, 주택(건물이 세워진 토지 가치 포함), 기타 국내자본 이렇게 세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기타 국내자본은 기업과 정부기관의 자본을 포함한다. 이런 자산들은 다른 자산과 마찬가지로 시장가치에 따라 평가된다. 따라서 도표들의 경우처럼 한 국가의 총 자본은 아래와 같이 분해할 수 있다. 145p.

국민 총자본 = 농경지+주택+ 기타 국내자본+순해외자본

  • 국민소득과 국민 총자본에 비해 급락한 농경지의 가치를 상쇄한 것은 주택가격의 상승이다. 18세기, 겨우 한해 국민소득에 해당되는 수준이었던 주택 가격은 오늘날 국민소득의 3배 이상으로 올랐다. 다른 한편으로 다른 국내자본의 가치 상승이 남은 자리를 메웠다. 이러한 장기간에 걸친 구조적 변화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반영한다. 그중 하나는 주택이 규모뿐만 아니라 질과 가치 면에서도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산업혁명 이후 기업과 정부기관이 비농업 분야의 온갖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업용 건물, 설비, 기계. 창고, 사무실, 장비 그리고 물질적 비물질적 자본이 대규모로 축적되었다는 사실이다. 자본의 성격은 변했다. 과거에 주로 토지였던 자본은 이제 부동산, 산업 및 금융자산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하다. 146p.

해외 자본의 부침

  • 영국과 프랑스의 해외 자본은 지난 300년 동안 식민지 시대를 주도했기에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변화했다. 이 두 나라가 세계 다른 지역에 소유한 순 자산은 18~19세기 사이에 점차 증가했고, 제계 1차 대전 직전에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1914~1954에 완전히 격감했다가 그 이후에는 비교적 낮은 수준의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146p.
  • 해외 자산은 1750~1800년에 처음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1812년 경 영국의 해외 자산은 국민 소득의 10퍼센트 밖에 되지 않았다. 세계 1차 대전 직전 까지 영국은 엄청난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국민 소득의 2배 가까운 해외 자본을 보유하고 있었다. 20세기로 접어들 무렵 해외자본은 배당금, 이자, 임대료로 연간약 5퍼센트의 수익을 낳았으며, 따라서 영국의 국민소득은 국내생산액보다 10퍼센트 가량 많았다. 이런 투자수익으로 꽤 많은 사회집단이 생활할 수 있었다. 147p.
  • 프랑스도 세계 두 번째 주요 식민제국으로써 1900년~1910년의 모든 해에 국민 소득이 국내생산보다 약 5~6퍼센트 높았다. 해외 자산으로 얻는 소득은 북부 및 동부 지역 departments 의 총산업생산량과 맞먹었다. 147p.
  • 이러한 해외자본 소득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가 구조적인 무역적자를 기록해도 괜찮았다. 1880~1914년에 이 두 나라는 해외로 수출하는 것 보다 더 많은 상품과 서비스를 다른나라에서 수입했다. 이 기간내 두 나라의 무역 적자는 평균 1~2퍼센트였다. 그러나 해외자산의 소득으로 인해 이 두 국가의 국제수지는 큰 폭의 흑자를 기록했고, 이로 인해 매년 해외 자산을 더 많이 보유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다른 나라들은 이 두 국가를 위해 일을 하면서 동시에 이 두 나라에 점점 더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48p.
  • 세계대전, 대공황, 탈식민지화의 누적된 충격으로 인해 이 두 나라의 해외 자산은 제로에 가까워졌다. (1950년 기준).
  • 18세기와 현재의 국민 총자본의 구조를 보면, 두 시기 모두 순해외자산의 역할은 미미했으며, 장기간에 걸친 구조적 변화 속에서 국민소득과 비교한 자본총량은 대체로 변하지 않았지만 농지가 장기간에 걸쳐 부동산과 영업 자본으로 점차 대체되는 실질적인 구조변화가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149p.

소득과 부 : 대략의 규모
  • 현재 영국과 프랑스의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은 3만유로 정도 이고, 국민총자본은 국민소득의 약 6배 정도 이므로 한 사람당 약 18만 유로다. 두 국가의 농경지 가치는 거의 없고 (기껏해야 1인당 수천유로 정도) 국민 총자본은 비중이 비슷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즉 국민한사람 당 평균 약 9만유로의 주택과 약 9만유로의 주로 금융기관을 통해 기업에 투자된 기타 국내자본이다. 149p.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의 부

  • 국민총자본을 공공부문 자산과 민간부문 자산으로 구분하는 문제를 살펴보면 자본이 세계2차대전 이후 부활한 까닭을 알기 쉬울 것이다. 공공자본과 민간자본을 구분하더라도 자본의 총액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국민총자본의 구성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개인의 재산권을 구분하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150p.
  • 국민총자본은 공공자본과 민간자본의 합이다. 자본은 국가의 자산에서 부채를 뺀 값이고, 민간자본은 개인들의 자산에서 부채를 뺀 값이다. 공공부문 자산은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비금융자산(기본적인 정부의 사무실 의료나 공공교육의 공공서비스에 이용되는 학교, 대학, 병원) 그리고 금융자산이 그것이다. 정부는 기업의 지분을 갖고 기업을 소유할 수 있다. 또, 국가가 취득한 해외 금융자산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기 위한 이른바 국부펀드들도 부상했다. 151p.
  • 금융자산과 비금융자산의 경계는 유동적일 수 있다. e.g.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텔레콤과 프랑스우체국을 주식회사로 전환했을 때, 이 두 회사가 쓰던 정부소유건물들이 예전에는 비 금융 자산으로 분류되었지만 이후 금융자산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 현재 영국에서는 공공부문 자산의 총 가치가 한해 국민소득과 거의 맞먹고, 프랑스는 1.5배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 두 국가모두 공공부채가 한 해 국민소득과 비슷한 규모이므로 공공부문의 부는 제로에 가깝다. 만일 두 나라 정부가 그들의 빚을 갚기 위해 그들이 소유한 모든 재산을 팔아넘겨버리고자 결정한다면, 영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프랑스에는 미미한 금액만 남을 것이다. 151p.
  • 확실한 계산 수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왜냐하면 시장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것들이 있으므로) 공공부문 순 자산이 아주 적고 민간부문 총 자산에 비하면 확실히 미미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측정의 불완전성과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두 나라의 2010년 전체 국부에서 민간 부문의 부가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영국은 민간부문의 부가 전체 국부의 99퍼센트를 차지했고, 프랑스에서는 95퍼센트를 차지했다. 두 경우 모두 정확한 수치가 90퍼센트를 넘는 것은 분명하다. (152p. 표 참고)  152-153pp.

역사적 관점에서 본 공공부문의 부

  • 18세기 이래 국민소득 대비 국민 총자본의 비율의 역사는 대체로 국민소득과 민간자본 간의 역사였다. (도표 3.5, 3.6 참조) 두 나라는 민간 부문의 부의 규모를 근본적으로 바꿀 만큼 많은 공공부채를 쌓아둔 적이 없다.
  • 이 두 나라 어느 곳에서도 공공정책이 극단으로 치달은 적은 없지만, 그 정책이 민간부문의 부의 축적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 적이 분명히 몇 차례 있었다. 18~19세기 영국에서는 정부가 대규모 공공부채를 짐으로써 민간의 부를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앙시앵레짐과 벨 에포크 시대 당시 프랑스 정부도 똑같은 일을 했다. 그러나 다른 시기에는 정부가 민간의부를 감소시키려고 노력했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스에서는 공공부채가 무효화 되고 거대한 공공부문이 만들어졌다. 영국도 정도는 덜했으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금 두 나라는 모두 대규모 공공부채를 지고 있다. 역사적 경험은 이런 상황이 매우 빠르게 변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보여준 정책 전환의 사례를 살펴보면 역사적 경험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156p.

영국 : 공공부채와 민간자본의 강화

  •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와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두 시기에 영국의 공공부채는 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는데, GDP의 20퍼센트 정도 수준이었다. 그 어느 국가보다도 높은 비율의 공공부채를 오랜기간 떠안고 있었지만 디폴트상태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어떤 국가가 단순히 부채 상환을 거절하는 직접적인 방식으로든 인플레이션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으로든 이런 저런 방식으로 디폴트에 이르지 않으면, 엄청난 규모의 공공부채를 갚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와 관해 19세기 영국의 공공부채는 교과서적인 사례다. 영국은 전쟁의 비용에 비해 세금을 충분히 얻지 못해 공공부채가 가파르게 증가했다. 156p.
  • 같은 시기 조세제도의 근대화와 귀족들의 세제 특권 폐지에 실패한 프랑스 왕정의 무능함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새로운 조세제도를 삼부회에서 제시되면서 토지세와 상속세 등으로 1797년에는 2/3의 파산이라는 사태가 닥쳤다. 실제로 기존 공공부채의 3분의 2에 대한 대규모 디폴트가 발생했다. 또, 당시 아시냐 지폐의 발행으로 높은 인플레가 발생하며 사태가 악화되었다. 결국 앙시앵레짐의 빚은 이렇게 청산 되었으며 프랑스의 공공부채는 19세기 첫 10년 동안 매우 낮은 수준으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157p.
  • 그러나 영국은 프랑스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영국은 공공부채가 1770년에 국민소득의 100퍼센트, 1810년에는 200퍼센트로 증가했는데, 이는 같은 기간 프랑스 공공ㅂ채의 10배였다. 영국의 부채를 점차 줄여 1910년에 국민소득의 30퍼센트 이하로 만들기 위해서는 1세기 동안 흑자예산을 짜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의 경험에서 영국의 공공부채는 민간부문의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재산을 가진 영국인들은 민간투자를 크게 줄이지는 않으면서 정부에 필요한 돈을 빌려주었다. 1770~1810년 크게 늘어난 공공부채는 주로 그에 상응하는 민간 저축으로 충당되었다 이는 당시에 영국의 유산계급이 정말 번창하였고 국채 수익률이 매력적이었음을 보여준다. 158p.
  • 또, 모든 면을 고려했을 때, 이토록 높은 수준의 공공부채가 채권자들과 그 자손들의 이해관계에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는 점이 분명하다. 세금을 통해 비용을 조달한 것 보다 빌려서 조달하고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민간 자본에 대한 더 호의적인 해결책이었음은 분명하다. 159p.
  • 여기에 결정적으로 차이점은 20세기에 비해 19세기에 정부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의 이득이 상당히 컸다. 성장률보다 높은 수준의 이자율(4~5퍼센트)을 지급받는 것은 당시 부자들과 상속인에게는 수지맞는 장사였다.
  • GDP 대비 5퍼센트의 지출을 늘리면서 그에 상응하는 조세를 거두지 않는 정부를 상상해보자. 20년뒤에 그 정부는 GDP대비 100퍼센트의 공공부채가 더 쌓일 것이다. 정부가 단순히 해마다 발생하는 이자만 지급할 경우, 이자가 5퍼센트라면 정부는 공공부채 소유자들에게 해마다 GDP의 5퍼센트를 영구적으로 지급해야할 것이다. 대체로 이것이 바로 19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159p.

공공부채는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

  • 역사적 사례들을 검토해보면, 결론적으로 공공부채는 민간자본에 이득이 되고, 맑스를 비롯한 19세기 사회주의자들의 공공부채를 왜 그토록 경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 영국과 프랑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여러 나라에서도 공공부채 투자자들은 두둑한 보상을 받았다. 전쟁과 배상금 등으로 인해 프랑스 정부는 커다란 빚을 떠안았는데, 당시 교육비 지출보다도 많은 국민소득 2~3퍼센트가 공공부채의 이자로 지불되엇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 이자로 생활했다. 161p.
  • 20세기에는 공공부채가 전적으로 다른 견해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공공부채가 공공지출을 늘리고 가장 가난한 사회 구성원들에게 이득이 되도록 부를 재분배 하는 정책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 견해와 앞선 사례의 차이는 단순하다. 19세기에는 채권자가 이자를 받아 사적인 부를 늘릴 수 있었던 반면, 20세기에 들어서는 부채가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가치가 하락했고 가치가 줄어든 화폐로 지불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실제로 그만한 세금 인상 없이 국가에 돈을 빌려준 사람들이 재정적자를 메우도록 해주었다. 공공부채에 대한 이러한 ‘진보적’인 관점은 인플레이션이 오래전부터 19세기보다 그리 높지 않은 수준으로 떨어지고 재분배 효과가 비교적 불분명한데도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영국과 프랑스는 인플레이션을 통해 재정적자를 국채 보유자에게 일정부분 메우게 하는 효과를 얻었는데, 이는 재분배 메커니즘이라고 부를 수도 잇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첫째로, 인플레이션 메커니즘은 목표를 선택하는데 그다지 정밀하지 않다. 어느 정도 재산을 보유한 사람들 가운데 국채를 가진 이들이 반드시 가장 부유한 사람들은 아니다.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둘째, 인플레이션 메커니즘은 무기한 작동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단 인플레가 지속되면 채권자들은 좀 더 높은 명목이자율을 요구하고, 따라서 물가상승이 기대만큼의 효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높은 인플레이션은 끊임없이 가속화되고, 통제하기 어렵다. pp.162-163.

리카도 등가의 부침

  • 리카도 등가는 공공부채가 국민총자본의 축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내용의 가설로, 1817년에 공식화되었다. 그는 주위에서 목격한 현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바든 것이 분명하다. 그가 책을 쓰던 당시영국의 공공부채는 GDP의 200퍼센트에 가까웠으나, 민간투자나 자본축적의 흐름을 고갈시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늘어난 공공부채는 민간저축증대로 충당되엇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리카도 등가가 언제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법칙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관련 사회집단의 번영, 제시된 이자율, 정부에 대한 신뢰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163p.
  • 1970년대 이후 공공부채에 대한 분석은 이른바 대표적 경제주체 모형에 경제학자들이 지나치게 의존하는 바람에 위기에 처했다. 이 모형은, 리카도 등가에 대한 재해석으로써, 각 경제주체가 같은 소득을 얻고 같은 금액의 재산을 물려받는다는 가정에 기반 한다. 이처럼 현실을 단순화 하면 복잡한 모형에서는 분석하기 어려운 논리적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있지만, 이러한 모형은 부와 소득분배의 불평등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함으로써 극단적이고 비현실적인 결론에 이르러 혼란을 낳기도 한다. 공공부채 문제에 이러한 시각을 사용할 경우 정부의 빚이 국민총자본 뿐만 아니라 재정적 부담의 배분에 있어서도 완전히 중립적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항상 부의 분배의 특징에는 부의 심각한 집중이 있었고, 부의 불평등을 살펴보지 않는 연구는 사실상 부라는 주제의 중요한 측면에 대해,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 쟁점인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pp. 164-165.

프랑스 : 전후시대의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 공공자산의 증가는 정부의 경제적 역할이 꾸준히 확대되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도표 3.4와 3.3참조) 이는 갈수록 발달하는 공공 서비스에서 기인한 것이며 여기에는 사회 기반시설에 대한 공공 또는 준공공투자가 포함된다.  이러한 사회기반투자는 영국보다 프랑스에서 더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분석은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빠뜨린다. 1950~1980년 산업과 금융 부문에서 상당한 규모의 공공자산의 축적이 이뤄지고 난 후 1980년 그 자산들에 대한 대대적인 민영화의 물결이 그것이다.
  • 프랑스 1950년의 공공자산의 총 가치는 국민 소득을 초과했다. 인플레로 공공부채의 가치가 급격히 감소함으로써 공공부문의 순자산은 국민소득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고, 당시에 민간의 자산 총액은 국민소득의 겨우 2배 수준이었다. (도표 3.6참고)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공공자산의 크기가 상당했다고 할 수 있다. 나라가 재건되고 이 나라의 역사에서 경제성장이 어느때보다도 강력했던 영광의 30년 동안 프랑스는 혼합경제체제를, 어떤 면에서는 자본가 없는 자본주의 혹은 개인이 대기업을 통제할 수 없는 국가자본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확실히 국유화의 물결은 1950년에 공공자산의 가치가 국민소득을 능가한 영국을 비롯해 같은 시기에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나타났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영국의 공공부채는 국민소득의 3배를 초과했기 때문에 공공부문 순 자산이 1950년대에 상당한 폭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고, 민간의 부는 그만큼 더 커졌다. 영국의 공공부문의 순자산은 1960~70년대에 들어서야 플러스로 돌아섰는데, 그때에도 국민소득의 20퍼센트를 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며 상당한 크기를 보였다. 168p.
  • 프랑스가 걸어온 길의 특징은 공공소유가 1950년부터 늘어나다가 1980년에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점이다. 금융과 부동산 같은 민간부문의 부는 국민소득의 6배 가까이 혹은 공공부문 부의 20배가 되었다. 1950년 이후 국가자본주의가 끝나고 프랑스는 21세기 새로운 사적 소유 자본주의를 약속하게 된 것이다.
  • 이러한 변화가 있는 그대로 명백히 인정되지 않았다는 점은 놀랍다. 경제민영화는 규제완화를 포함하는데 그 기원은 복잡하고 다양해졌다. 대공황에 따른 재앙들은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전후 재건 등으로 높은 성장률을 구가하던 시기가 끝나면서 정부의 역할과 국가 전체 생산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무한정 확장되는데 의문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경제 자유화의 길을 걸으며 규제완화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저성장과 고실업, 대규모 재정적자가 계속되는 가운데 프랑스 정부는 1990년 이후 공공부문이 보유한 주식을 점진적으로 팔아치웠다. 이는 비록 공공부채의 꾸준한 증가를 막을 수는 없었으나, 정부의 금고에 추가적인 자금을 가져다주었다. 공공부문 순자산은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고, 민간의 부는 20세기 충격 이래  유례없이 높은 수준을 회복했다. 이런 식으로 프랑스는 국가의 자본 구조를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1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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